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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에 헌신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by 에이스토리 2023.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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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우장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소장

식민지 조선과 지배국 일본의 험난한 혼혈 우장춘은 식민과 분단의 상흔으로 얼룩진 한국 근현대사의 신화적 인물이며, 국모 시해에 가담한 역적의 아들이 세계적 석학으로 성장한 후 척박한 조국으로 돌아와 가난과 기근을 물리친다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우장춘을 둘러싼 겹겹의 신화는 학자 우장춘을 오독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대표적 예가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했다는 오해입니다.

 

씨 없는 수박은 일본 육종학자 기하라 히토시의 개발품이고 우장춘은 농민의 관심을 끌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재배했을 뿐입니다.

 

영웅 서사와 민족 신화를 걷어내면 씨앗에 헌신한 육종학자 우장춘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유한한 국경의 틀을 넘어 무한한 과학의 세계 안에 학자 우장춘의 조국은 자리합니다.

 

세속의 경계를 넘어, 신화와 서사의 베일을 걷어야 우장춘이 조국에 남긴 위대한 유산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1. 성장과정: 우(禹) 나가하루(長春)

1898년 4월 도쿄, 을미사변에 가담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 무인 우범선과 일본인 사카이 나카 사이에 장남 우장춘이 태어났습니다. 

 

위태한 망명생활 중에도 우범선은 자신의 본적지 한국 경성에 장남의 호적을 올렸습니다. 한국 성 ‘우(禹)’와 일본 이름 ‘나가하루(長春)’를 합한 U Nagaharu, 세계 유전학의 진보를 이끈 경이로운 논문 『종의 합성』 저자 이름엔 망명가 아버지의 귀환 의지가 새겨있습니다.

 

 

1903년, 우범선이 암살된 후, 남은 가족들은 어머니 쪽 친척의 양자로 입적해서 법률상 일본인으로 살았지만, 우장춘은 본래 성을 고수했습니다.

 

‘우’는 차별의 족쇄이자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었습니다. 그는 국립 농사시험장에 입사해 기수로 16년을 근무하고도 상위 직급인 기사로 승진하지 못했습니다. 농사장의 만년 기사 ‘우’는 박사 학위를 가진 유일한 기수였습니다.

 

 

구레중학교 시절의 우장춘(앞줄 오른쪽)

1916년 구레중학교를 졸업한 우장춘은 어려운 집안형편 속에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관비유학생이 되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류상의 국적 덕에 한국인 유학생 자격으로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했습니다. 애초 우장춘은 공학부를 희망했으나, 연구자보다 기술자가 필요했던 조선총독부는 장학금을 주는 조건으로 농과대학 진학을 지시했습니다.

 

농학실과는 학술 이론을 연구하는 대학이 아니라 농업기술자를 양성하는 학원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농학실과 졸업은 ‘학자’ 우장춘에겐 학력 차별의 걸림돌로 작용했지만, ‘농업지도자’ 우장춘의 기초를 다진 디딤돌 역할을 했습니다.

 

훗날 우장춘은 “공학과에 진학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공학과에 진학했다면 무기제조 연구에 몰두했을지도 모른다”라고 술회했습니다.

 

가난과 관료제에 떠밀려 택한 진로가 세계 육종학의 역사를 세울 학자의 운명으로 이어졌습니다.

 

 

 

2. 대표업적①: 우장춘의 트라이앵글 - 종의 합성

피튜니아 교배작업을 하고 있는 우장춘과 실습생

1919년 대학 졸업 후, 우장춘은 농학자에게 최상의 직장으로 꼽히는 국립 농사시험장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유전학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초기에 연구한 것은 주로 나팔꽃과 피튜니아. 서로 닮은 데다 성질도 비슷해 당시 일본의 유전학자들이 주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식물이었습니다.

 

우장춘이 육종에 성공한 겹피튜니아 꽃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사다까 종묘회사는 그의 신종 씨앗을 취급해 높은 수익을 올렸습니다.


우장춘은 농학 엘리트들 사이에서 출신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박사 학위 논문에 열과 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1930년 완성한 나팔꽃의 유전에 관한 논문은 불행히도 제출 하루 전날 시험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연구자료와 함께 전부 불에 타버렸습니다. 

 

수년간의 노력이 사라진 불운에도 우장춘의 민들레꽃 정신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에 탄 논문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과감히 과제를 유채꽃으로 변경하고 다시금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1936년 5월, 우장춘은 『종의 합성』 논문으로 동경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우장춘은 양배추와 재래종 배추 씨앗을 교배해서 서양유채 식물을 만들었고, 양배추, 재래종 등 세 가지의 세포학적인 관계를 밝히는 염색체 분석에 성공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유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종간 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종의 합성 이론은 ‘우장춘의 트라이앵글’로 불리며 유전학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현재 전 세계 각지에서 사용하는 종자 합성 기술은 우장춘의 이론을 기초로 시작됐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기하라 히토시의 ‘씨 없는 수박’도 우장춘의 이론을 기반으로 개발한 품종입니다.

 

 

1859년 다윈이 저서 『종의 기원』을 통하여 밝힌 진화론은 종내에 존재하는 변이가 자연선택에 의해 새로운 종으로 발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우장춘은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하여 이미 알고 있는 또 다른 종을 합성해 냄으로써 다윈이 생각하지 못했던 진화의 원리를 보완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종의 합성』은 복합적인 사유가 가능한 현대진화론 시대를 열어주는 과학적 발견인 것입니다.

 

 

 

3. 대표업적②: 씨앗의 독립

식민시대 한국의 농업정책은 쌀과 보리 같은 식량 생산에 중점을 두고, 무와 배추 같은 채소육종은 일본산 종자를 수입했습니다. 

 

해방 이후 일본산 종자 수입이 단절되자 자체 생산기술이나 자본이 없는 한국은 밀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제 타격과 식량 불안으로 절박한 국가 상태에서 우량종자의 자급생산은 국민의 생존과 직결한 문제였습니다.

 

 

귀국해 부산부두에서 환영의 꽃다발을 받은 우장춘

『종의 합성』으로 과학계와 일본 미디어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던 육종학자 우장춘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국의 종자 문제를 해결할 인물로 우장춘이 적임자라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그의 귀국을 열망하는 ‘우장춘 환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됐고 전문가는 물론 식량난 개선을 바라는 시민들의 손길이 모여 귀국 자금과 연구소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1949년 우장춘이 초대 소장으로 부임할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창설하면서 환국추진위원회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1950년 3월 가족은 일본에 남겨두고 우장춘 홀로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위원회가 일본에 남은 가족을 위해 보낸 자금은 한국연구소에 필요한 육종도서, 실험기구, 종자 등을 구입하는 용도로 사용됐습니다.

 

우장춘은 한국의 육종학자로 새 삶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과 함께 귀환했습니다.

 

 

1950년 5월 10일,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하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단호히 거절하고, 우장춘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부산 동래의 2만 평 규모의 시험농장, 직원 12명과 소장이 직접 구비한 연구 기자재가 전부인 작은 연구소였습니다.

 

우장춘은 전국의 농촌을 직접 조사하면서 한국의 농업 현실을 상세히 파악하고, 육종사업과 후진양성에만 매진하겠다고 목표를 정했습니다.

 

 

우장춘은 김치가 주요 식품인 한국의 식생활에 맞춰 배추와 무 종자를 만드는 작업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외국에서 들여온 품종과 각지에서 채집한 재래종 품종을 비교해서 우량 개체를 선발하고 김장에 적합한 크고 아삭하며 병충해에 강한 신품종 무와 배추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1954년 신품종 배추와 무 종자의 대량생산이 성공하고 전국에 보급을 시작했습니다. 우장춘을 기점으로 한국 배추와 무는 독자적인 품질개량을 거듭했고,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육종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1951년 10월 우장춘은 채소원종을 생산하고 대량생산할 적임지를 고르기 위해 제주도를 시찰했습니다. 제주도는 빠른 장마와 평탄한 지형 때문에 채소 재배로는 부적합하지만, 기후가 귤재배에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우장춘은 제주에 온주밀감을 심고 과일나무를 취급하는 농민을 지원하도록 요청했습니다. 당장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여건이 우선이지만 식생활이 향상되면 귤 같은 비타민이 풍부한 과일이 국민의 건강증진에 기여한다는 혜안이 담긴 조치였습니다.

 

 

1954년 기생충 문제로 한국 먹거리에 불신이 심했던 주한 미군은 수경재배를 통한 깨끗한 채소 공급을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우장춘은 처음엔 고비용이 드는 수경재배는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했지만, 완강한 대통령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수원에 수경시설을 만들고 채소를 재배했는데, 청정채소는 비싼 값에도 인기가 높아 미군의 주문이 쇄도했습니다. 이때 도입한 수경재배 채소가 오늘날 우리 식탁에 오르는 깨끗한 채소의 시초입니다.

 

 

부산원예시험장에서 우장춘과 연구원들

1957년 우장춘은 한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한 다음 단계로 감자를 주목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씨감자는 바이러스 병균이 심해 수확량이 30~50%에 불과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씨감자를 대량으로 수입했습니다.

 

우장춘은 강원도 대관령에 시험지와 채종포를 설치하고 무병 씨감자 생산에 착수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공수한 신품종 감자와 동래의 연구소에서 만든 씨감자가 대관령 곳곳에 심어졌습니다.

 

아쉽게도 우장춘은 무병 씨감자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무병 씨감자는 우장춘 사후 제자 최정일이 연구를 이어받아 생산에 성공했습니다.

 


일본에서 우장춘은 최신 학술연구와 첨단 육종기술 발전에 중점을 두고 노력했습니다. 반면 육종학의 암흑기에 놓인 한국에선 채소 종자의 자급과 보급에 치중하고 육종학과 육종기술의 토대를 세우는 데 힘썼습니다.

 

한국에 육종학의 씨앗을 뿌리고 후학들이 그 씨앗의 생명을 무한히 이어가는 유전학의 계보를 구축했습니다.

 

 

 

4. 황혼기: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1958년 우장춘은 한국 농업의 중요과제인 벼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한 번 수확한 그루터기에 줄기와 잎이 다시 나와 일 년에 두 번 수확할 수 있는 ‘일식이수(一植二收)’벼 재배가 목표였습니다. 

 

이 획기적인 벼 재배가 성공한다면 한국 농업은 물론 육종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경이로운 성과로 남을 연구였습니다.

 

 

하지만 1959년 우장춘은 위와 십이지장궤양으로 세 차례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위장이 약하고 위궤양과 당뇨가 있었고, 한국에 온 이후는 신경통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어 다음날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우장춘은 마지막까지 연구하던 벼 이삭을 병실에 두고 바라봤습니다.

 

 

이근직 농림부 장관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고 있는 우장춘

8월 7일 농림부 장관 이근식이 병실을 찾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습니다. 건국 이래 우장춘이 두 번째 수상자인 영예로운 포상이었습니다.

 

1959년 8월 10일 문화포장이 장식된 병실에서 우장춘은 향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귀환의 약속대로 조국에 뼈를 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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