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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일대기 정리(feat. 설리번 선생)

by 에이스토리 2023.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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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는 1880년 6월 27일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주 어릴 때는 비장애인이었으나, 생후 19개월 때 앓은 뇌척수막염으로 하루아침에 시력과 청력을 한꺼번에 모두 잃고 시청각장애인이 되어,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라는 3중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정상적인 교육이 될 리 없었고, 대여섯 살이 될 때까지도 물건을 던지거나 사람을 할퀴거나 때리는 정도로밖에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습니다.

 

6살이 되던 무렵에 부모는 볼티모어에 사는 유명한 안과 의사 줄리안 차이소름 박사가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헬렌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해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시신경이 남김없이 모두 죽은 후라서 치료는 불가능했고, 대신 교육을 충분히 시킬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박사를 소개받습니다.

헬렌 켈러
10대의 헬렌 켈러

 

 

 

그를 만난 부모는 "퍼킨스 맹인 학교"를 추천받고, 그 학교에 의뢰하여 가정교사를 부탁합니다. 이때 온 사람이 유명한 앤 설리번입니다.

 

설리번은 고아였고, 어린 남동생이 있었지만 일찍 병으로 여의었고 그녀도 지독하게 눈이 나빠 엄청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원래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퍼킨스 맹인 학교를 다녔고, 이후 눈 수술을 받아 시력을 다시 얻게 된 것입니다.

 

 

 

헬렌 켈러와 설리번

헬렌 켈러 설리번
8세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앤 설리번은 응석받이로 자랐던 헬렌에게 극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방식으로 언어를 가르치려 했습니다. 

 

물 펌프에서 처음으로 'water'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에피소드는 매우 유명합니다. 이후 8살 때 퍼킨스 맹인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교육도 받게 됩니다.

 

6년 후에는 뉴욕으로 가서 라이트 휴먼스 농아학교를 다니고, 그 이후에는 호렌스만 농아학교를 다니는데, 이 학교의 선생인 새라 풀러가 목의 진동과 입의 모양을 만지고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헬렌에게 말하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칩니다.

 

이 방법으로 헬렌 켈러는 말은 할 수 있게 됩니다.

헬렌 켈러 설리번
헬렌 켈러와 설리번

 

 

 

그 후 여동생인 밀드레드와 함께 케임브리지 여학교에 다닌 뒤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여대에 입학하고, 04년 졸업할 무렵에는 5개 국어를 습득했습니다.

 

이후에는 활발한 사회, 봉사활동(특히 장애인 인권 운동)을 했습니다.

 

 

 

서리 임금님 사건

오늘날에는 우연의 일치로 치부되지만 동화 표절설이 있습니다.

 

1891년에 헬렌이 쓴 단편 동화인 <서리 임금님>은 마거릿 캔비가 쓴 <서리의 여신>과 유사해서 표절 의혹을 받았습니다. <서리 임금님>은 낙엽을 울긋불긋 칠한다는 내용인데, 그 내용이 똑같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고의적인 표절이 아니라, 1888년 무렵에 보스턴에 갔을 때 소피아 홉킨스에게 들은 내용을 헬렌이 무의식적으로 쓴 게 아니냐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캔비는 고의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넘어갔지만, 학교에서는 '서리의 여신'을 표절한 것 아니냐며 다그쳤다고 합니다.

 

이게 헬렌에게는 어지간히 상처가 되었는지 헬렌 켈러의 후반부 생애를 다루는 전기에서는 이 에피소드가 꼭 언급됩니다.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

장애의 극복 사례 및 장애인 인권운동가로만 알려진 것과는 좀 다르게, 헬렌은 1909년(29세)부터 사회당에 가입한 사회주의자로 허버트 조지 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웃긴 건 헬렌 켈러는 인종차별을 극도로 혐오하는 개념인이었으나, 웰즈는 백인 우월주의자였습니다.

 

설리번은 스스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지만 1905년 사회주의자인 존 메이시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1914년에 이혼했고 슬하에 자녀는 없습니다.

 

 

 

그 외 작가로서의 저술 활동도 활발하고 여성 참정권, 인종차별반대, 장애인 복지, 노동자 보호 운동 등 사회운동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허나, 그녀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은 당시 매카시즘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미국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국내에서도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과 자료를 찾아보지 않았다면 성년기 이후 헬렌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입니다.

 

 

 

사실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연간의 미국 사회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을 보면 반드시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입니다.

 

1912년의 대선에서 유진 뎁스가 패배하자 이후 사회당의 소위 개량주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전투적 노동자 단체인 IWW(세계 산업노동자 동맹)에 가입했습니다.

 

이후에도 죽기 전까지 사회주의 관련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 때문인지 한동안은 FBI에게 감시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프러제트이기도 하고,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고통을 감수하며 싸우지 않는 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말년에는 이것과 더불어 사회주의 등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헬렌은 작가가 되어 자서전을 포함한 여러 책을 쓰면서, 보스턴 근처인 랜섬에 정착했습니다.

 

한편, 언어를 깨친 이후로도 그녀의 성장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애니와 (그 후임인) 폴리 톰슨이라는 보조자가 붙어 손바닥에 모든 정보를 전달해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온 탓에 톰슨의 오른손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였습니다.

 

 

 

또한, 애니는 가방끈이 짧았던 탓에 헬렌의 수업을 청강할 때 따라잡기 힘들어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밥벌이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금전 감각이 부족하며 완벽주의적인 성격 탓에 후원자들과 마찰도 자주 빚었고, 헬렌이 책을 써서 번 저작료와 강연비 등으로 생계를 잇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헬렌의 아버지인 아서가 사업에 실패하며 가세가 기울게 되자, 헬렌 부모가 딸의 후원금을 착복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다행히 헬렌이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됐으니 애니 입장에선 가르친 보람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앤 설리번의 한 친구가 앤을 칭찬하기 위해서 "당신이 없으면 헬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애니는 "그럼 내가 헛되이 산 게로군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한편, 1915년에는 비서인 피터 페이건(Peter Fagan)에게 청혼을 받았으나, 헬렌의 가족들이 반대해서 헤어졌습니다.

 

 

 

헬렌 켈러의 노년기

헬렌 켈러
헬렌 켈러

헬렌은 장수했으나 그만큼 주변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먼저, 애니가 1936년에 세상을 떴고,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코네티컷에 있던 집에 불이 나서 그동안 쓴 원고가 대부분 소실됐습니다.

 

당시 애니의 전기를 쓰던 헬렌은 이 화재 때문에 원고를 다시 써야 했고 1958년에 출간했습니다.

 

폴슨이 1960년에 사망한 뒤에는 은퇴했고, 헬렌은 노환으로 은퇴한 뒤 후임 도우미인 에블린 시드(Evelyn Sid)와 집에 머물다가 1968년에 향년 87세로 사망했습니다. 88번째 생일을 불과 26일 앞둔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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