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혹시 11월 3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신가요? 바로 학생 독립운동기념일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께서 잘 모르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오늘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란?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일제강점기 때 일어난 학생항일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기리게 하는 목적으로 제정된 법정 기념일입니다.
즉, 학생들의 자율적인 역량과 애국심을 함양시키고자 하는 날인데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학생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1953년에 처음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것으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10월 유신 시대에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이 계속됨에 따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해 1973년 3월 30일에 폐지되었습니다.
이후 이 날을 기억하던 사람들에 의해 부활 운동이 일어나 1982년 9월 14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제정에 관한 건의안'이 국회에 상정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 덕에 1984년 9월 22일 국무회의는 학생 독립운동기념일을 '학생의 날'로 부활시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회 분위기가 변모됐었던 1990년에는 의미조차 퇴색되는 등 험난한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기억할 수 있도록 2006년 2월 9일 국회에서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해 이를 의결하며 현재의 상태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학생독립운동은 어떻게 확산되었을까요?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되어 1930년 3월까지 지속된 학생들의 시위 운동입니다. 이는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전국에서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항일운동인데요.
그럼 왜 학생들이 들고일어났을까요?
일제강점기가 20년 정도 흐르게 되면서 한반도에 상시 거주하는 일본인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인 학생들의 수도 마찬가지로 많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본인 학생들도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일본인만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많이 설립됐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존에 조선인이 다니던 학교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곳은 일본인 학생이 다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장과 같은 주요 임원진들도 주로 일본인이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각종 식민지 교육과 차별대우가 자행되었습니다.
즉, 분리 교육에 따라 차별이 발생했고 이는 일본인만 다니는 학교와 조선인만 다니는 학교의 충돌로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충돌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 중학교 학생들의 충돌을 계기로 하여 더욱 커져 항일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 집단 싸움이 발생했고 이를 말리러 파견된 일본인 경찰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의 편만 들고 조선인 학생의 따귀를 때리는 등 구타를 하는 차별대우를 했었는데 이것이 곧 사건 전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광주 시내의 각 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한 투쟁에 동참케 하는 사건으로 발전되어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사건 여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한국 학생을 75명이나 체포했으나 일본 학생은 10명 정도만 잡아가는 시늉, 임시 휴교 처분, 학생 운동의 철저한 탄압이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본 경찰의 대응은 학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광주 시민의 참여까지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시위 참여 학생 무기정학, 학교 무기 휴교 언론 탄압과 같은 더 강경한 대응으로 이에 대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 경찰의 실태가 훗날 신간회의 도움과 보도 탄압의 해제로 이 소식이 전국의 학생들에게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서울, 평양, 함흥, 신의주, 부산, 대구, 춘천 등지로 확산되어 약 54,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학생 독립운동가는 누가 있었을까요?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천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던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하다 미국인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추천으로 1916년 서울의 이화 학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유관순의 인생은 무난하게 흘러가는가 싶었지만, 그러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장이었던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해 참가를 말렸지만 많은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유관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1919년 3월 10일 전국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면서 사촌 언니였던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입니다. 그리고 유관순은 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도중 일본 경찰에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의 부모님은 이미 만세 운동 과정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고, 유관순도 심한 고문에 시달린 나머지 결국 1920년 9월 28일에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가족 전체가 독립운동가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마리아는 독립군을 치료하는 의사였던 아버지 김필순,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어머니 김순애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는 1919년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이었던 황애덕 등 유학생들과 함께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2.8 독립선언 이후 조선에서 독립 선언 운동을 준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김마리아는 2.8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가는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됩니다.
그녀는 선언서를 안전하게 가져가기 위해서 일본인으로 변장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요. 당시 기모노를 입고 허리띠인 오비에 10장의 독립선언서를 숨겨 성공적으로 조선으로 가져오게 됩니다.
이후, 김마리아는 3.1 운동에 독립 선언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임시정부의 대의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끝까지 힘썼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크게 잘 알려진 날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신 모두는 이 날을 기억할 수 있으시겠죠?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기념하여 학생들의 용기와 독립정신을 떠올리고 숭고한 민족정신을 함께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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